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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면] 여순사건, 그 아픔에 대한 기억과 공감에 대한 상세정보
[8면] 여순사건, 그 아픔에 대한 기억과 공감
작성자 언론사 등록일 2022.03.17

여순사건, 그 아픔에 대한 기억과 공감 

최현주(국어교육과 교수, 여순연구소장)

어찌 잊겠는가 그 속에 경악한 너의 아름다운 눈물을 그 눈물이 세상보다 

넓게 번져 세상보다 넓은 세상의 중심으로 육화되는 것을 - 김정환 「피살(被殺)」 

5·18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그것에 대한 기억과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짧은 시이다. 5·18 은 20년간의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 이후 민주주의 를 외쳤던 광주시민들이 군인들에 의해 참혹한 죽 임을 당한 사건이다. 5·18은 정통성을 갖지 못한 권력이 국민을 학살한 경악할 국가폭력 사건이었 고,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1987년 6월 항쟁을 불러왔고,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주의가 시작 된 계기가 되었다.  

4·19 때도 이승만 독재 권력은 민주주의를 외치는 학생과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고 결국에는 발포함 으로써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1948년에 발 생한 제주 4·3과 여수순천 10·19 또한 국가에 의 해 저질러진 학살의 역사였다. 그리고 이 두 사건 은 4·19와 5·18에 비해 더 처절하고 엄청난 피의 살육이었다. 광주 5·18 때 국가폭력에 의해 돌아가 신 분이 300여 명 정도였다면, 제주 4·3은 3만명, 여순 10·19는 1만5천명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불 법적인 폭력행위가, 학살이 그것도 국가에 의해서, 국민의 군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주인인 국민에 게 잠시 권력을 위임받았을 뿐인 권력집단이 무고 한 국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슬픈 역사를 우리 현 대사는 이처럼 반복해왔다. 

여순 10·19 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군인들 이 제주 4·3사건의 진압을 위해 제주로 출동하라 는 이승만 정권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하 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봉기한 군인들은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 즉시 철퇴의 두 가지 사항을 전면 에 내걸었다. 이런 이유로 여순사건은 결단코 반란 사건이 아니라 동포에 대한 학살을 거부하고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군인과 민중들의 봉기였다. 그리 고 배경에는 외세에 의한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통 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염원과 민족의 해방 후에도 미군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비호 받고 득세 하는 친일파 군인 경찰 관료에 대한 처벌에 의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더욱 큰 문제는 여순사건 이후 진압군에 의해 벌 어진 무고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친일 경찰과 관료들의 개인적 감정과 판단에 의해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학살이 여수 순천 광양 구례 고흥 등에서 이루어졌다. 1만 5천여 명의 민 간인 학살이 국민의 군대에 의해 자행되었음에도 국가는 아직도 지역민과 피해자 유가족들에게 사 과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 광주 5·18과 제주 4·3 에 대해서는 국가에 의한 사과와 더불어 특별법 이 만들어지고 사건의 실체와 진상규명 작업이 이 루어진 것에 반해 여순 10·19에 대해서는 아무 것 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여기에 우리 여수 순천 의 지역민들이 여순 10·19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공감해야만 할 이유가 있다. 경악 할 국가폭력에 의해 피살된 분들에 대한 우리의 기 억과 공감이 전국민의 여순사건에 대한 관심과 국 가의 반성,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대책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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