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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인의 글]1학기 철학인의 글 행사 정리글입니다. 에 대한 상세정보
[철학인의 글]1학기 철학인의 글 행사 정리글입니다.
작성자 김예은 등록일 2021.05.30

2021학년도 철학과 학술부장 김예은입니다. 1학기 철학인의 글 행사는 4월 28일부터 5월 28일까지 제출, 교수님들께 피드백을 받으며 진행되었습니다. 철학적인 에세이 글을 쓰고 피드백받는 과정에서 글 쓰는 실력이 향상될거라 기대했으며, 

쓰지 않는 것보다 스스로 써보는 활동을 통해 분명히 배워가는 것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학술부원들과 1월부터 함께 행사들을 고민했기에 저희에게도 굉장히 많은 의미가 있는 활동이었습니다. 

29일자로 행사가 마무리 되었으며, 제출하신 글과 교수님들의 피드백을 이렇게 카페에 기재하게 되었습니다. 

피드백은 익명으로 진행되었고, 철학과 교수님 세 분이 참여해주셨습니다. 다들 바쁘신 와중에 우리 철학과 학우분들을 위해

해주셨으니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피드백 내용을 꼼꼼히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더욱 더 성장하고 세상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철학도로 우리 순천대학교에서 학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주제와 주제 선정 이유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존재에 대해 들어보면 좀비가 생각납니다. 

김형식 작가의 ‘좀비 학’이라는 책을 보면 ‘좀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좀비는 인간의 범주와 사회에서 무참히 배제당하고 내버려 진 비인간이다. 죽을 권리조차 박탈 당한 채 타오르는 태양 밑에서 끝없는 노동을 하며 서서히 꺼져 가는 비참한 생명이다. 일상화된 차별 속에서 임금을 지불받지 못하고 신체가 뭉개져도 고통을 표출해서는 안 되는 이주 노동자다. 절단된 다리와 뒤틀린 팔로 더러운 대지 위를 기어 다니는 장애인이다. 돌아갈 집이 없어 구석진 길모퉁이에 아무렇게나 너부러진 노숙인이다.”

 

이 작가의 좀비에 대한 정의를 생각해보면 우린 많은 좀비를 일상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살아있다는 건 철학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말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철학인의 글 주제를 '살아있다는 건 어떤건가요?'로 정했습니다. 밑에 작성된 글은 1~4학년까지 다양한 학년의 철학과 학우분들이 작성해주신 글이며, 교수님들의 피드백은 파일로 첨부했습니다. 행사에 참여해주시고 관심가져주신 분들께 모두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앞으로 진행될 행사에도 관심을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더 노력하며 발전하는 학술부가 되겠습니다. 

 

1번 제출자 

제목: 인간의 욕구가 충족되는 순간

       -살아있다는건 어떤건가요?-

 

우리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사람들은 각자의 일정에 맞춰 각기 다른 하루를 보낸다. 그 하루는 누군가에게 특별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매일 똑같은 지루한 하루일 수 있다. 하지만 뭐가 됐든 다들 눈을 뜨는 순간부터 하루를 사는 것은 공통된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눈만 떴다고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필자의 경우 하루하루를 살면서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앞서 말했듯이 눈이 떠졌기 때문에 하루를 보내는 것 뿐이다. 그 하루는 주어진 일들을 하면서 보낸다. 만약 누군가 “너 지금 살아있니?”라고 묻는다면, 그때서야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살아있다고 답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불현 듯 살아가는 이유를 느끼거나, 살아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그 순간은 힘든 일상 속에서 안정을 찾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 순간이다. 사람의 인생을 담아 놓은 드라마, 웹툰 등을 보면 한 번씩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은 힘든 일을 마친 뒤 집에서 쉬거나, 지친 일상 속 가족 혹은 친구들을 만나거나, 자신의 꿈을 이루는 순간이다. 이때 표현은 다를지라도 같이 나오는 대사가 있다. 바로 “이게 사는거지”다. 사람은 왜 많고 많은 순간 속에서 앞서 말한 순간에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걸까? 이는 인간의 기본 욕구 때문이다.

인간의 욕구를 얘기하면 모두가 아는 이론이 있다. 바로 Maslow의 욕구계층이론이다. Maslow가 제시한 인간의 욕구단계는 5단계로 나뉘는데, ① 생리적 욕구, ② 안전 욕구, ③ 소속감 및 사랑 욕구, ④ 존경 욕구, ⓹ 자기실현의 욕구 순이다. Maslow는 1단계부터 4단계까지의 욕구는 결핍 욕구로, 5단계의 욕구는 성장 욕구로 구분했다. 단, 여기서 필자는 ①→②→③→④→⓹ 단계 순으로 이루어진다는 관점이 아닌, 각각의 종류로써 단계와 상관없이 충족시킬 수 있다는 관점에서 썼다는 점을 밝힌다.

Maslow가 말한 욕구의 종류와 함께 앞서 언급한 예를 구체적으로 들어보자. 대학생 A가 있다. A는 시험을 앞두고 잠을 줄여가고 있다. 현재 A는 인간의 가장 기본 욕구인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것을 알 수 있다. 생리적 욕구는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 강력한 욕구로서 수면이 해당된다. 그렇게 공부하던 A는 마침내 모든 시험을 끝내고 편안하게 잠에 들고 결과를 기다린다. A는 열심히 공부한만큼 학과 1등과 장학금을 받고자 기대했고,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이는 자아실현 욕구를 충족했다고 볼 수 있다. 자아실현 욕구는 성장 욕구로서 타고난 자신의 잠재능력을 최대한으로 실현코자 하는 욕구다. A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한 상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예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당장의 욕구를 포기한 채 하루를 보냈던 A는 마침내 자신의 욕구를 충족했고, 그 충족은 삶의 이유를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마침내 A는 “이게 사는거지”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욕구 충족을 위한 과정을 이겨내고 결과에 다달았을 때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욕구를 가지고 있고, 인간은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그 를 위한 과정은 결과로 나타나고, 나타난 결과는 삶의 이유가 되어준다. 즉 살아있다는 것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한 순간을 깨달았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2번 제출자

제목: 살아있다는 것에 대하여(5월 철학인의 글)

 

우리는 흔히 살아있는 게 무엇이냐고 했을 때 생물학적으로 심장이 뛰고 뇌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를 말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쓰이고 있기에 이것도 맞는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과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반성하고 배운다는 것이 곧 살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지금 뭐하지?’, ‘내일은 무슨 일이 생길까?’ 등 여러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또 생각합니다. 우리가 죽었을 때 과연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죽었을 땐 이미 우리는 사라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생각하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허나 ‘갓 태어난 아이는 생각하나?’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봤을 때 아기는 배고프거나 졸리다고 울기만 하기에 저런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저는 그런 아기들도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기가 배고프다고 울 때 지금 배고프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울어서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얘기한 거처럼 우리는 생로병사의 순환을 하는 동안 계속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살아있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만 한다고 살아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만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 행동에서 좋은 행동도 있겠지만 안 좋은 행동도 있을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반성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오늘 지내면서 잘못한 것은 없을까?’, ‘지금 내가 말한 의도는 이거였는데 혹시 오해했을까?’ 등 우리는 반성하고 성찰을 합니다. 그렇게 다음에 실수를 줄이고 나중에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안가도록 노력을 하게됩니다. 우리가 흔히 사람도 아니 짐승보다도 못한 것들이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죄를 짓고도 반성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 보고 우린 인간도 아닌 것들이라고 칭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반성을 하는 것도 살아간다 것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배워야지만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우는 것이 꼭 학생 때만 배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계속 배워갑니다. 학생 때는 학교에서 사회에서 필요한 지식이나 역량을 배우고 회사에서는 회사 생활에 필요한 역량이나 노하우를 배웁니다. 또 친구끼리도 배우고 가정에서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 이처럼 우리는 배움과 땔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 상태에서 배움을 멈춘다면 그 사람은 발전이 없을 것이고 결국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 못한 체 도태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배운다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3가지를 들면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제 생각을 써봤습니다. 처음 이것을 쓸 때 동물까지 포함하려 했지만 먼저 우리가 인간이고 인간의 입장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하여 범위를 인간으로만 한정지어 봤습니다. 인간이란 생각하는 동물이라 했습니다. 그런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하고 반성하고 배운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번 제출자 

 

한 사람이 살아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호흡이나 맥박, 운동 활동 등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물학적인 조건들은 인간 뿐만이 아닌 모든 동물에 적용되는 조건이다. 그러나 인간은 분명 다른 동물들과 다르며, 살아있는 동물과 살아있는 인간의 조건 역시 다르다. 인간의 학명은 Homo Sapiens인데, sapiens는 ‘이성을 갖춘’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형용사이다. 인간의 학명에서부터 선언되고 있듯이, 우리가 살아있는 인간으로 불리고 있는 조건은 바로 이성이다.

 

내가 여기에서 주목하는 이성의 단면은 합리적 사고 능력이다. 사람은 합리적으로 생각할 때에 살아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눈 앞에 주어진 사물이나 상황에 대해 스스로 합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남들의 의견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간단한 원리이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이성이 빠질 수 없는 만큼 이는 매우 핵심적인 인간의 기능 중 하나이다. 합리적 사고가 없었다면 과학과 철학, 정치를 비롯한 그 어떤 학문도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며, 인류는 전염병과 전쟁 등 각종 위기를 맞을 때마다 멸종의 위기에 내몰렸을 것이다.

 

내가 이성과 동치로 둔 합리성의 의미를 풀어보면 ‘이치에 합하는 성질’이라는 뜻이 된다. 내가 생각하는 이치란 곧 상식이다. 인간은 명시적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당연하다고 여기는 지식들을 갖고 있다. 일종의 정언명제라고 할 수 있겠는데, 남을 해치지 말라는 것이 가장 간단한 예시이다. 이 상식을 이루는 각각의 항목들은 예시처럼 매우 짧은 내용들인데, 이 상식들은 항상 모여 다니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에 상당히 긴 전제를 부여한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을 할 때 저런 것들을 하나하나 따져보지 않는다. 이 전제들이 우리의 무의식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본능의 영역 외에 있는, 가끔은 본능에 반하는 전제들을 내면화할 수 있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다.

 

인간의 학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성이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비이성적인 인간들의 이성은 잠시 마비되었을 따름이며, 그들의 이성이 깨어나지 않는 한 그들은 죽은 시체들이나 마찬가지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정치적, 종교적 극단주의와 반지성주의적인 음모론 등 합리성에 근거하지 않은 것들에 심취하면 인간의 이성은 마비된다. 우리는 이미 이성적이지 못한 인간들이 얼마나 위험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는지 봐서 알고 있다. 백신이 사탄의 물질이라는 음모론을 신봉하는 이들 때문에 종식되었던 홍역이 다시 유행하기도 했으며, 종교 극단주의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중동 지역 전쟁의 씨앗이다.

 

합리성에 근거하지 않은 모든 것들은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허술하다. 그런데 그 ‘조금’의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가 앞을 향해서만 향해가고 있다는 것은, 모든 비이성을 자연스레 도태시킬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이성이 성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4번 제출자 

제목: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

 

황급한 발걸음, 그의 뒤에선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듯 바싹 말라버린

얼굴과 이미 죽은 것이 아닐까 의심되는 생기없는 피부를 한 이들은, 두 눈의 이미 초점을 잃었음에도 굶주린 하이에나 때처럼 그를 한없이 쫒아온다. 여러 갈래로 우거진 나무들,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을 향해서 그는 빠르게 달려 나간다. 빛이 점점

커져 가는 것을 보고 그는 끝에 다다랐음을 직감한다. 마침내 느껴지는 따스한 햇살,

그러나 빛의 끝에서 그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가파른 낭떠러지뿐이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배로 늘어난 이들의 수, 더 이상 그에게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조여오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살고 싶어...”

이 장면은 대중매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좀비들을 피해 도망치는 주인공의 장면을

표현해 놓은 것이다. 이 장면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좀비에게 둘러싸여 최후를 맞이하기 직전에 “살고 싶어...”라고 얘기한다. 그는 왜 그렇게 얘기하였을까?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주인공은 좀비를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좀비의 특징 중에선

좀비는 다른 이를 물면 그를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이 있다. 즉 주인공은 좀비에

물리면 감염되어 그 즉시 자신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좀비에게 물린다고 해서 죽는 다는 것은 글을 쓰는 작가가 그러한 특징을 더하지 않은 한

그 것은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좀비에게 물려 죽는다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은 흔히 죽은 이들의 세계라 불리는 사후세계의 특징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죽음, 그 이후의 상황은 오직 죽은 이만 알 수 있는 상황이다. 이는 사후세계의 존재를 죽은 이만 알 수 있다는 점과 비슷하게 좀비가 된 사람만이 좀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경험하지 않은 미지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경험에 대한 추측 뿐이다. 그렇다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정의내리기 보다 경험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의미를 알아가야 할 것이고 죽는 다는 것보다는 당장 경험하고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살고 싶어 한다. 또한 더욱 잘 살고 싶어 한다. 허나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는 개개인마다 다르게 작용한다. 누군가는 항상 도덕적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이 그 의미 일 수 있고 또한 누군가는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살아간다는 것을 충족할 수 있는 반면에 누군가는 정말 숨만 붙어 있다면 살아있다는 것이 충족 될 수 있다. 이러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확립은 곧 그들의 가치관으로 연관되는

부분이 있다. 가치관은 누군가의 죽음이나 갈등, 사건, 경험 등등,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나도 모르게 그 영향을 인지하고 행동한다. 그 예를 들어 일상의 각종 부정적인 행위들이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있는 현장에서는 평소보다 행위를 함에 있어서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이 타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혹시 테세우스의 배를 들어보았는가? 테세우스의 배란 테세우스의 업적을 기르기 위해 그의 배를 보존하게 되고, 보존하는 가운데에서 그의 배에 썩은 판자가 생기면 지속적으로 보존하기 위해서 그 판자를 갈게 된다. 허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썩은 판자는 지속적으로 생겨나게 되고 결국에는 배의 판자를 모두 갈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그 배는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한 난제를 의미한다. 살아가는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얘기하는 와중에 무슨 이야기인가 할 수도 있으나 어떻게 보면 타인의 영향에 따라서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떠한 삶이 진정한 삶인가에 대한, 살아가는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와 연관 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있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는 배의 판자들이 모두 교체된 것과 상관없이 그 배를 보는 사람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인식한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배가 테세우스의 배로서 정의되어진다고 생각한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로 정의내리면 내릴수록 그 배는 테세우스의 배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앞서 말했던 살아가는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우리의 육체는 언젠가 본래의 형태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 때가 된다면 형태를 잃어버린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란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테세우스의 배처럼 누군가 나의 존재를 기억해주고 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고 그 사람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우리는 타인의 크고 작은 영향에 변화하게 되며 육체를 잃고 난 후에도 타인으로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세상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만화 원피스에서 Dr. 히루루크는 말한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중략)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다.“ 이와 같이 타인의 중요성을 알고 또한 그런 나를 아는, 그래서 타인이 세상에 자신이 살아있었음을 오랫동안 기억되는 삶을 모두

살았으면 하고 바란다.

 

5번 제출자 

제목: 사람답게 살아가기

 

살아있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단순히 생존 여부일 수도 있고, 자기가 원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정진하는 것도 있으며,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다는 조건이 붙은 경우도 있다. 필자는 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에 주목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정당한 인권을 보장받고 생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당한 인권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지는 권리를 보장받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며, 혹시 부족한 요소가 있더라도 배려받는 것이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 개인은 그저 수단, 더 부정적으로 말한다면 소모품 취급을 받게 된다.

김형식 작가의 ‘좀비학’에서 좀비는 사회에서 합당한 대우와 배려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일상화된 차별 속에서 임금의 불이익을 받는 이주 노동자, 신체가 불편한 장애인, 돌아갈 곳이 없는 노숙자, 부모나 어른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이에 해당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직접 보게 되거나, 혹은 TV나 인터넷과 같은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다. 생활하면서 스스로 해결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아 결국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실정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이들에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들에게 인권은 매우 낯선 개념일 것이다. 인권은 본인이 스스로 인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같이 살아가는 사람, 나아가 사회가 그것을 인정하고 보장해야만 비로소 지켜진다. 우리는 인권에 대해 당연한 권리인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이 침해당했을 경우에는 스스로 극복할 힘을 가지고 있으며, 타인에게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낼 수 있다. 그러나 ‘좀비’는 인권을 지킬 수 있는 방어적 기제를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리고 사회가 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좋은 방향성을 가진 사회는 이들의 어려움에 대해 주목하고 배려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들은 소수이기에 그들의 의견을 피력하기가 평범한 사람보다 매우 힘들다.

사회는 일명 ‘좀비’들이 살아있고 싶다는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야 한다. 이들은 스스로 살아있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부족한 요소에 대한 배려를 바라는 손을 사회에 뻗고 있다. 인간이 모여 형성한 공동체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있을 때 서로 도와 헤쳐나가기 위해 존재한다. ‘좀비’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있음’을 보장받아야 한다. 그들의 도움을 외면하게 된다면 그 공동체는 가장 큰 목적을 지키지 않은 것이며, 나아가 그 안에 속한 우리도 이들과 같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아무도 도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6번 제출자 

제목: 숨 쉬는 건 아가미로도 할 수 있는데

 

내가 생각하는 살아있다는 건 단순히 숨을 쉬며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타인에게 존중받았을 때 가능하다.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면 아르바이트할 때 새로 온 신입에게 교육하며 선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커피기계를 마감할 때 이런 방식으로 해, 그런데 누구는 이렇게 하고 누구는 이렇게 한다. 너도 익숙해지면 네가 편한 대로 하게 될 거야” 스쳐 지나가는 말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단순히 내가 교육 받는 입장이 아닌 나만의 방식을 창조하고 구축하는 한 존재로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를 단순히 파트타임근무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도 확장한다면 이것이 살아있다는 걸 정의하는 것이다. 단순히 이 세상에서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생각하고 회의적으로 일상을 영위하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나만의 길을 만들어가고 그것이 하나의 방식으로 인정받는 것 바로 그런 삶이 진정 살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만의 길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조금은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와 연애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연애하는 동안 마주하는 사물이나 장소는 그 이전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같은 물병이어도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물병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삶에서 사랑이란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 된다. 공산품으로만 존재할 물병에서 다른 차이를 발견하고 연인에 의한 상황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처럼, 사랑은 크게 보면 인간이라는 동일한 조건에 존재하는 이들을 다르게 느껴지게끔 한다.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 그 자체에서 발현되는 행위들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살아있다는 건 비슷해 보이지만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다르게 살아가는 이들의 방식을 존중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모습인 것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깎은 길에 누군가 걷지 않는다고 해서 그 길이 쓸모없는 길인 건 아니다. 누군가 지나가며 있는 길을 존중해준다는 것, 더 나아가 그 길을 함께 걸을 의향을 비친다는 것. 그때 우리는 진정 살아있다고 느낄 것이다.

숨을 쉬고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아가미를 가진 생선도 마찬가지고, 식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왜 인간은 유독 그들보다 더 우월한 가치와 계급을 가질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이 유일하게 생각하고, 반성하고, 발전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동물, 식물과는 다른 취급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때로는 구성원을 언제든 교체 가능한 공산품으로 대하며, 썩지 않아 골칫거리인 흔해 빠진 플라스틱 물병으로 취급한다고 생각한다. 구성원 모두가 자신이 살아있다는 감정을 느끼는 데 비싼 돈을 들이지 않고, 많은 희생을 하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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