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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국가폭력으로서의 여순사건, 그 아픔에 대한 기억과 공감 - 국어교육과 교수 최현주에 대한 상세정보
[칼럼] 국가폭력으로서의 여순사건, 그 아픔에 대한 기억과 공감 - 국어교육과 교수 최현주
작성자 언론사 등록일 2019.12.03



  1. 국가폭력으로서의 여순사건, 그 아픔에 대한 기억과 공감




 어찌 잊겠는가

그 속에 경악한 너의

아름다운 눈물을 그 눈물이

세상보다 넓게 번져

세상보다 넓은 세상의

중심으로 육화되는 것을

  - 김정환 피살(被殺)


5·18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그것에 대한 기억과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짧은 시이다. 5·1820년간의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 이후 민주주의를 외쳤던 광주시민들이 군인들에 의해 참혹한 죽임들을 당한 사건이다. 5·18은 정통성을 갖지 못한 권력이 국민을 학살한 경악할 국가폭력 사건이었고,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19876월 항쟁을 불러왔고,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주의가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


4·19 때도 이승만 독재 권력은 민주주의를 외치는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고 결국에는 발포함으로써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이와 같은 부당한 국가폭력은 4·195·18만이 아니었다. 1948년에 발생한 제주 4·3과 여수순천 10·19 또한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의 역사였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은 4·195·18에 비해 더 처절하고 엄청난 피의 살육이었다. 광주 5·18때 국가폭력에 의해 돌아가신 분이 300여명 정도였다면, 제주 4·33만명, 여순 10·1915천명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불법적인 폭력행위가, 학살이 그것도 국가에 의해서, 국민의 군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주인인 국민에게 잠시 권력을 위임 받았을 뿐인 권력집단이 무고한 국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슬픈 역사를 우리 현대사는 이처럼 반복해왔다. 과연 국가는, 군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여순 10·19 사건은 19481019일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제주 4·3사건의 진압을 위해 제주로 출동하라는 부당한 이승만 정권의 명령에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군인들이 이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봉기한 군인들은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의 두 가지 사항을 전면에 내걸었다. 이런 이유로 여순사건은 결단코 반란사건이 아니라 동포에 대한 학살을 거부하고 미군철수를 주장한 정의로운 군인과 민중들에 의한 봉기였다. 그리고 그들의 봉기 배경에는 외세에 의한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염원과 민족의 해방 후에도 미군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비호 받고 득세하는 친일파 군인 경찰 관료에 대한 처벌에의 의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한편 더욱 큰 문제는 여순사건 이후 진압군에 의해 벌어진 무고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친일 경찰과 관료들의 개인적 감정과 판단에 의해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학살들이 여수 순천 광양 구례 고흥 등에서 이루어졌다. 15천여 명의 민간인 학살이 국가에 의해, 국민의 군대에 의해 자행되었음에도 국가는 아직도 지역민과 피해자 유가족들에게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 광주 5·18과 제주 4·3이 국가에 의한 사과와 더불어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사건의 실체와 진상규명 작업이 이루어진 것에 반해 여순 10·19는 국가에 의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여기에 우리 여수 순천의 지역민들과 대중들이 여순10·19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공감해야만 할 당위가 존재한다. 위에 인용된 시구절과 같이 경악할 국가폭력에 의해 피살된 분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과 공감이 전체 국민들의 여순사건에 대한 관심과 국가의 반성,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대책들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최현주(국어교육과 교수, 여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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